개인적 소망

작가는 과학기술이나 역사 자체 또한 가정이 시뮬라크로 세워지는 것이 때문에 방법에 모순이 존재하고 이는 의미 없다는 식의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우리의 세상은 과거의 유물이고 이를 통째로 부정하는 행위가 의미가 있나 싶다. 작가가 경계하는 미디어 또한 하늘에게 뚝 떨어진게 아니지 않은가. 과학기술에 발달과 개인적 사회적 변화에 따라 이 미디어의 역할 또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실 예로 AI의 발전으로 기자라는 직업에 변화로 들 수 있어 보인다. 또 다른 예로 미디치 효과로 들고 싶다. SNS의 발달로 많은 지식인들은 또 다시 미디치 효과를 예언했다. 아직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아 판단하는 것이 섯 부르긴 하지만 르네상스 같은 예술적 지식적 폭발이 있어보이진 않다. 이는 시뮬과 시뮬의 만남의 한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은 이는 개인적 소망이다. 나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또한 시뮬라크르라고, 좋은 시뮬라크르라고 표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의 올바름에 대한 헌신 또한 소비되는 이미지로 취급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뮬라시옹이라는 책을 재대로 읽지도 않고 그저 이해한 바로만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행동임을 알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하고 싶다. 이는 미학의 차이이다. 가짜가 아무리 아름답더라고 소박한 진짜가 더 멋있다.